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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 2006/05/1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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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제2회 윤지훈&최승원전 평론

I. 모든 시도와 탐색을 거듭하여, 현재의 미술은 고갈된 탄광마냥 메말라 있다. 자원을 고갈시키듯이 "이

것은 했다" 혹은 "이것은 미지의 것이다"라고 이야기되는 다양한 미술적인 탐색들은 이제 -모든 사회적

인 진보의 형태와 다르지 않게- 양적인 포화와 질적인 정체의 모순된 양면을 드러내며 점차 희박한 호흡

을 하게 되었고, 미술 영역의 전반적인 개념으로써의 ‘새로운 것’이란 더 이상 뒤샹의 그것과 동일시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한 분야를 끝장낸 이후에 다른 헤게모니를 찾아 침흘리며 낮은 포복을 하는, 직선적

인, 끝없이 미래를 현재화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전진의, 20세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미술에서의 서구적

인 사건이다. 이러한 서구적인 미술의 진보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미 21세기가 들어서기 이전에 충분히

많은 반박이 있었고,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다. 이것이 현재에 있어 전세계가 아시아 혹은 제3세계의 의식

에 집중하는 까닭이고, 동양인들이 동양인으로써 미술하는 것이 점차 중요해지는 까닭이며, 동시에 섣부

른 미술인들이 선언한 회화의 종말을 재고해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윤지훈/최승원 2

인전은  국내 정규 미술교육(대학)을 받지 않은 건축과 학생이지만 20대의 젊은이로써 전통 화구를 사용

한 평면회화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규 미술입문과정에서 비껴서서 나름대로의 작업과 전시를 모색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전시는 각각의 그림을 접하기에 앞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II. 최승원의 작업은 좁은 시야영역을 갖는다. 그것은 아주 강한 집중을 드러내며, 다소 조작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섣불리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강한 잔상을 만들어내는 특징을 갖는다. 그 원인

은 그림 안의 수많은 당김음?의 활용때문이며, 스스로도 작업중에 그것에 취해버리는 무의식/무절제를

종종 경험하는 듯 하다. (그것은 옳다/그르다 혹은 좋다/나쁘다의 선별 밖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무엇을 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작업중인 ‘캔버스를 보는 시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정확할 듯 하다. 그의 작업은 선과 색면의 끊임없는 만다라적 자기 복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작가가

‘무엇을 보는가’ 혹은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를 제 2선으로 차치해 두는 것은 현대 평면 미술에서 많은 조

잡한 결과들을 낳았지만, 그에 비하면 최승원은 훨씬 잡스럽지 않고 꾸미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깔끔

한 cutting edge를 갖는다. 하지만, 미술은 본래 ‘보는’ 것이므로 -그것은 유클리드적 투시도법을 가리키

는 것이 아니라, 물빛을 보고 그물을 치는 뱃사람의 시선을 말한다.- ‘무엇을 보는가’의 분명한 위치정립

에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최승원의 작업이 아주 날카롭지만 좁은 영역에서 움직임으로써 작업의 밀도를 높이는 것이라면, 윤지훈

의 작업은 그와 반대로 넓고 두꺼운 영역을 다져 단단하게 압축한다. 탄탄한 소묘실력과 자신감으로 인

해 자신의 캔버스 안으로 무엇이든 끌어들일 수 있는 전제하에 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의 작업은 ‘밑칠’로

서의 소묘와 선묘가 바탕이 되며, 그가 그림을 시작하는 부분은 그 이후의 지점에서부터이다. 곧 그의 문

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2차원 이미지 위에 어떤 변주화음을 넣을까의 문제인 것이다. (사실 아주

큰, 인생을 아우를만한 주제가 없는 한- 무엇을 그릴까의 고민이 항상 따라붙는다.) 그리고, 윤지훈은 그

지점에서 소재와 스트로크의 변환을 통해 은근하지만 ‘기본형’과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서 일

단의 흐름을 잡은 것 같다. 그에게 시각적인 이미지는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미묘한 효과를 만들어내

는’ 부분으로 집중된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화구의 사용이 뒤따른다. 전체의 형상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

한 것이 아니다. 청바지가 그림 속에 있다면, 그 질감과 촉감을 넘어서 냄새와 그 속의 탄력있는 허벅지

까지 표현 가능한/왜곡 가능한 소재 혹은 붓의 활용에 집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내용의 충

실성이나 밀도가 낮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 부연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묘사의 안정감과 자신감 덕분

이다. 항상 작업에 신중함과 느긋함으로 임하여 차곡차곡 자신만의 수순을 밟아가는 것이 성질급한 필자

로써는 때로 답답하기까지 하지만, 지긋이 자신의 과거를 눌러 기름기를 빼가는 행보는 누구나 본받을만

한 것이리라.



III. 그들이 2인전을 개최함에 앞서 내게 글을 부탁해 왔을 때, 나는 적잖은 난감함이 있었다. 그것은 비전

공자로써 미술하기가 어려운 한국의 현실에 맞서고 싶지 않아 우회하여, 미대를 다닌 자신에 대한 부끄

러움이었고, 미술만이 아닌 여러 가지를 아우르고자 하는 학생들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

감함을 무릅쓰고 그들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서술하는 이유는, 미술이 시지각/이미지의 게임만은 아님을

본능적으로 파악해 나아가는, 그리하여 아시아의 에피스테메와, 더 나아가 우주의 신성성(神聖性)과 조

우하게 되는 복잡하고 험난한 과정을 그들이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지, 혹은 어떻게 돌아나갈 것인지를

처음 이성을 사귀는 순간의 유치하지만 재밌어 어쩔 줄 모르는 그 심정으로 -하지만 은연중 심각하고 민

감하게- 지켜 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그곳에 조악한 글이나마 덧대고 싶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사람

들이 그들의 미래에 주목할 수 있기를 바란다.




jan, 4, 2003.  김 병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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